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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사 | Kabe |
원산지 | Turgenje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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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들과 아들들' 에스페란토판 (카베 번역)
책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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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시골에서의 한달』『첫사랑』『아버지와 아들』『루딘』『처녀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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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의 상황 속에서 국민 모두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하고 아르카다가 점잖게 말했다.'우리는 그 요구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이기주의의 만족에 젖어 있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어쩐지 바자로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구절에서는 철학, 즉 로맨티시즘의 냄새가 풍기는 것이없다. 바자로프는 철학을 로맨티시즘이라 부르고 있었다. --- p.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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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 책 사는 .. 책내용 책상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작고한 소설가 이병주님이, 한 에세이에서 자신의 동경 유학 시절 어느 친구 둘이 ''죄와 벌''을 두고 격론을 벌이다 멱살드잡이까지 했었단 에피소드를 인용하며 ''때로 젊음은 그런 과오를 통해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법이다''고 술회한 구절을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읽으며 내내 그 구절을 떠올렸다. 프랑스의 2월 혁명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출간 년도가 1848년이고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이 1861년의 일이니, 1858년 배경의 이 소설이 어떤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을지 오롯이 감지된다. 말하자면, 그런 ''과오''가 한 젊음을 성숙시키기에는 너무 가파른 변화로 어리둥절했던 시기, 결국, ''바자로프''는 그 성숙의 결실이 채 영글기도 전에 생을 마치고 만다...... * 두 부모, 아니 정확히는 두 아비와 한 어미가 있다. 아르카지의 아비인 니콜라이는, 그 자신도 아들과 아들의 친구인 바자로프처럼 ''빼쩨르부르그''에서 대학을 마친 데다가 평생 지속된 사색과 독서가 만만찮음에도, 아들 세대와의 메울 수 없는 괴리감에 곤혹스러워한다. 퇴역 군의관인 바자로프의 아비 역시, 자식인 바자로프의 따가운 시선을 애초에 피하기 위해 자신 역시 ''못 배운'' 어미와 다를 바 없이 독실한 신앙심의 소유자임을 굳이 숨기려 든다. 이들은 아들과 시대과 좀 서운하대도, 이렇게 자신들의 관점과 자리를 후속 세대에게 양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숙명, 혹은 섭리쯤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언젠가 나는 돌아가신 어머님과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어머님께서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역정만 내시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드디어 우리들 차례가 되어, 우리들의 후계자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군요. 당신들은 우리 세대의 인간이 아니다! 입에 쓴 약이지만 먹어라, 하고 말입니다." - 소설 속에서 니콜라이의 한 마디 이들이 비교적 쉽게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 것에 비해, 니콜라이의 형으로서 아르카지의 백부인 퇴역 장교 ''파벨''만은 순순히 젊은 세대의 ''자만심''을 용인하지 않으려 한다. 이 ''파벨''과 ''바자로프'' 사이에 벌어지는 토론이야 말로 단연 (세대/사상적 갈등의 부각이란 면으로 봤을 때)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 할만하다. 그들은 역사, 철학, 과학, 예술, 종교 등 거의 전 영역에 걸쳐 사사건건 대립한다. 파벨이 귀족주의, 혹은 엄밀히 정신의 귀족주의를 얘기하면, 바자로프는 그것이 도대체 자명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추궁한다. 파벨이 자유주의를 논할 때, 바자로프는 ''리버럴리즘''이란 그의 외래어 사용이 함축하는 사상적 식민성을 빈정댄다. 파벨의 이상주의에 맞서 바자로프는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질적 힘을 강조한다. 파벨이 각 개인의 각성과 존엄이 중요하다 할 때, 바자로프는 사회 시스템만 공정해진다면 그 개인들 각각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 대꾸한다. 파벨이 자신도 현실적 제약 속에서 최대한 ''진보''를 실천하고 있음을 강변할 때, 바자로프는 그런 행위 역시도 귀족적인 지적 허영의 발로에 불과하다며 ''농노와 대화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오딘쵸바로 인해 사정이 좀더 복잡해지고 몇 몇 반전이 마련되는 계기가 없었더라면, 아마 바자로프의 위풍당당한 기세만이 이 소설에선 쩌렁쩌렁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전혀 투르게네프의 의도가 아니었을 터. * 스스로 ''농노와 대화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바자로프에 대해, 작가는 말미에 묘한 에피소드를 삽입하고 있다. 바자로프를 ''어릿광대''로 평하는 두 농부의 대화를 기록하며, 그 역시 ''현실''에 발디디기는 아직 요원한 인격에 지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이 발표와 동시에 신구 세대 모두에게서 맹렬히 공격받은 까닭이 아마 여기서 비롯하지 싶다. 그러나 작가 자신은 ''바자로프''란 인물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끼며 이 소설을 썼다 한다. 나 역시 투르게네프의 진심을 믿게 되는데, 결함없는 영혼에게 애정을 쏟는 작가란 못내 어색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격하고 또 과오를 범하기 쉬운 영혼이 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 할지라도, 그 위에 피어 있는 꽃은 순결한 눈으로 온화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꽃은 변함없이 영원한 안식만을, 비정한 자연의 그 위대한 안식만을 말해 주고 있는 건 아니다. 그 꽃들은 또한 영원한 화해와 무한한 삶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소설의 종결부 [2003-10-29] |